공산주의가 어떻게 우리나라에 뿌리내렸는지, 100년의 숨겨진 이야기...

충격! 100년 전 을지로 중국집에서 시작된 조선공산당의 비밀 1925년 서울 중국집 2층에서 창당된 조선공산당이 어떻게 해방 후 폭력혁명을 시도했는지,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간첩활동의 실체를 파헤칩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공산주의가 어떻게 뿌리를 내렸는지 아시나요? 1919년 3·1독립운동의 좌절 이후 절망에 빠진 우리 민족에게 공산주의 사상이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중국 간첩 조직의 군사기밀 유출 시도 사건을 보면서, 100년 전부터 시작된 공산주의의 침투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 1917년 러시아혁명, 조선에 밀려온 빨간 물결

공산주의가 한반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건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직후였습니다. 레닌이 주도한 이 피의 혁명이 성공하면서 전 세계에 공산주의 물결이 급속하게 퍼져나갔죠.

1919년 3월 2일, 모스크바에서는 전 세계 공산화를 목표로 하는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이 창설됩니다. 각국의 공산당이 러시아 공산당의 지휘를 받게 된 거예요. 바로 이때부터 조선에도 공산주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3·1독립운동으로 나라를 되찾길 기대했지만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직면한 우리 민족의 허탈감이 극에 달했을 때, 백성들의 마음을 파고든 것이 바로 공산주의 사상이었습니다."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공산주의 이념보다는 항일 독립운동에 더 관심이 있었어요. 미국이나 유럽보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러시아가 우리 민족을 도와줄 수 있다고 믿었거든요. 실제로 러시아 공산당은 세계 식민지 민족 해방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했습니다.

🚩 1918년 이르쿠츠크에서 시작된 조선의 첫 공산당

본격적인 한국 공산주의 운동은 1918년 1월 22일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시작됩니다. 김철훈이 주도해서 이르쿠츠크 공산당 한인지부가 조직된 거죠.

그해 6월 26일에는 이동휘의 주도로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이 창당됩니다. 이것이 바로 본격적인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출발점이었어요.

한국 초기 공산주의자들은 "설령 못 나눠주고 있는 자 없는 자 차별 없이 잘 사는 평등한 세상"이라고 선전했습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공산주의 실체를 제대로 모른 채 공산당에 가입했죠.

🏛️ 1925년 서울 을지로 중국집에서 탄생한 조선공산당

이동휘가 러시아에서 만든 한인사회당은 1921년 1월 상해의 고려공산당으로 발전했습니다. 이 고려공산당의 청년동맹 책임비서가 바로 박헌영이었어요.

드디어 1925년 4월 17일, 서울 을지로 1가의 중국집 '서원' 2층에서 역사적인 순간이 찾아옵니다. 김재봉이 주도한 서울 좌파 조직들이 비밀리에 모여 조선공산당을 창당한 거죠.

다음 날인 18일에는 젊은 공산주의자들이 박헌영의 집에 모여 고려공산청년회를 만들었고, 당시 25세의 박헌영이 실권자가 됩니다.

⚔️ 일제강점기 공산당의 지하활동과 탄압

조선공산당이 창당된 지 7개월 후인 1925년 11월 22일, 신의주에서 조선공산당원이 일본 경찰을 폭행하는 사건이 터집니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조선공산당의 존재를 알게 되죠.

1926년에는 6·10만세운동을 주도한 조선공산당원들에게 체포령이 내려집니다. 두 번의 사건으로 총 135명의 조선공산당원이 체포되고 100여 명이 재판에 넘겨지면서 세력 확대는 벽에 부딪혔어요.

유명한 일화로, 서대문형무소에 들어갔던 박헌영이 정신병자 행세를 해서 풀려난 사건도 바로 이때 일어났습니다. 풀려난 박헌영은 소련으로 달아나 국제 레닌 학교에 입학했고, 1934년 국내에서 다시 체포되어 1939년까지 6년간 복역했죠.

🇰🇷 해방 직후 공산주의자들의 급부상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찾아왔지만, 동시에 국토 분단의 비극도 시작됐습니다. 소련군이 38선 북쪽을, 미군이 남쪽을 점령하게 된 거죠.

국내 지식인과 대중들 사이에 깊이 뿌리를 내려가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군과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오자 유리한 환경 속에서 해방을 맞았습니다. 앞을 내다보기 어렵던 해방 직후 남한에서도 먼저 주도권을 잡은 건 바로 공산주의였어요.

광주에서 올라온 박헌영은 해방 직후인 8월 16일 서울 명륜동에서 자신이 1925년 만들었던 조선공산당 재건 준비위원회를 만들고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라는 문서를 발표했습니다.

"이른바 '8월 테제'로 불리는 이 활동지침은 민족 분열과 계급 대립을 부추기는 내용이어서 혼란에 빠져 있던 우리 민족에게 매우 위험한 지침이었습니다."

💔 분단의 시작과 남북 공산당의 분열

박헌영은 전국건국준비위원회를 차츰 장악해나갔습니다. 마침내 9월 6일에는 경성제대 강당에 600여 명의 정치인 대표자 회의를 소집해 이 자리에서 인공, 즉 조선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선포했어요.

9월 8일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기 이틀 전이었습니다. 미군이 오기 전에 미리 정부 수립을 선언하겠다는 속셈이었죠.

하지만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국 신탁통치안이 가결됩니다. 미국은 한국의 즉시 독립을 제의했지만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했어요. 국내에서는 좌익과 우익이 모두 반대에 나섰지만, 며칠 후인 1946년 1월 2일 소련의 지령을 받은 박헌영은 돌연 찬탁, 즉 신탁통치를 찬성한다는 입장으로 돌아섰습니다.

🎭 남한에서의 공산주의 침투와 대중조작

1946년은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물자 부족으로 사회가 폭발 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물가가 하루에도 두 배, 세 배 뛰고 당장 먹을 것도 없으니 보수 우파 정치인조차 "빨리 식량 배급을 달라"고 요구할 정도였어요.

남로당은 이런 민심을 이용해 무수한 조직을 만들어냈습니다.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 전평, 조선인민 애국청년동맹, 민청, 조선부녀민주동맹, 부민연, 그리고 민주학생연맹까지. 지역마다 거미줄처럼 뻗어나간 좌익 단체들이 모두 남로당의 산하조직이었어요.

첫 번째로 신전술을 행동에 옮긴 사건이 바로 1946년 9월 총파업이었습니다. 9월 23일 부산 철도노동자 7,000여 명이 파업에 들어갔고, 다음 날인 24일에는 서울 등 전국의 철도노동자 4만 명이 파업에 참여했습니다.

💥 총파업과 테러: 폭력혁명의 실체

철도파업을 신호탄으로 전국의 운수, 섬유, 방직, 화학, 출판, 인쇄 등 40여 개 노조 단체에 소속된 노동자 25만여 명이 파업에 가담했습니다. 서울에서만 295개의 공장이 멈춰 섰고 노동자 3만여 명과 학생 1만 6,000명이 동참했어요.

하지만 9월 총파업으로 노동자들이 얻은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식량 문제 해결도 처우 개선도 없었어요. 처음부터 소련군정과 남로당의 정치적 음모에 의한 파업이었거든요.

자신감을 얻은 공산당은 9월 총파업을 전초전으로 삼아 대대적인 폭동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고,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소요들이 잇따랐습니다.

박헌영의 지령과 9월 총파업을 전후해 공산당원들은 요인 저격에도 나섰어요. 이승만의 자동차가 창덕궁 앞길에 다다랐을 때 골목에 잠복하고 있던 괴한이 척탄을 던졌지만 실패했습니다. 10월 16일에는 조병옥 경무부장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는 사건도 발생했죠.

🔍 현재까지 이어지는 간첩활동의 위험성

100년 전 시작된 공산주의의 침투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 드러난 중국 간첩 조직의 군사기밀 유출 시도 사건이 이를 여실히 보여주죠.

중국 국적의 청모씨는 군사기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한국인과 중국인 등 최소 10명으로 구성된 간첩 조직의 일원으로, 현역 한국 군인에게 접근해 군사기밀을 빼내려 한 혐의를 받고 있어요.

특히 주목할 점은 이 조직이 중국군 연합참모부 산하 정보기관의 지휘를 받으며 활동했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한 개인적 차원의 정보 수집이 아닌, 국가 차원에서 지휘된 조직적 간첩 활동이었던 거죠.

이들이 노린 정보는 한미 연합훈련과 작전계획, 사드(THAAD) 관련 자료, 심지어 핵 작전 지침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중국 정부가 한국의 군사 동향뿐만 아니라 한미 동맹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하려 했음을 보여줍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시작된 공산주의의 한반도 침투는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다양한 형태로 계속되어 왔습니다.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부터 해방 직후 남로당의 활동, 그리고 현재의 중국 간첩 조직까지, 그 수법과 목표는 변해왔지만 본질은 동일합니다.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이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첫걸음입니다. 과거 공산주의자들이 어떻게 대중의 절망과 혼란을 이용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사회에 침투했는지를 알면 현재의 안보 위협에도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단순히 이념이 아니라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우리 후손들이 살아갈 터전입니다. 역사의 교훈을 잊지 않고 경계심을 늦추지 않을 때 진정한 평화와 안전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댓글 쓰기